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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말레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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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레이시아 말레이인은 말레이시아 헌법에 따라 이슬람교를 믿고, 말레이어를 사용하며, 말레이 관습을 따르는 말레이시아 시민의 자녀로 정의된다. 말레이시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며, 2023년 기준 57.9%를 차지한다. 말레이인과 이슬람교의 동일시는 15세기 말라카 술탄국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말레이어, 문화, 이슬람교가 말레이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말레이 반도에는 다양한 고대 왕국이 존재했으며, 이슬람교는 12세기부터 전파되었다. 말레이시아 말레이인은 언어, 문화, 인구 통계, 유전학적으로 다양한 특성을 보이며, 다양한 하위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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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말레이인
일반 정보
야자수 잎을 끄는 전통 놀이를 하는 말레이시아 말레이 어린이들
야자수 잎을 끄는 전통 놀이를 하는 말레이시아 말레이 어린이들
아랍 문자}}
총 인구 (2023년)17,610,458명
말레이시아 인구 비율 (2023년)57.9%
거주 국가말레이시아
사용 언어말레이어족 (다수의 토착 말레이어 변종)
표준 말레이어
영어
종교수니 이슬람
관련 민족태국 말레이인
싱가포르 말레이인
인도네시아 말레이인
브루나이 말레이인
필리핀 말레이인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인
역사적 맥락
말레이인 기원 논쟁말레이인의 이주민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음

2. 말레이인의 정의

말레이인과 이슬람교의 동일시는 15세기 말라카 술탄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말레이 정체성이 발전하고 전파되었다. 말레이성의 일반적인 정의는 이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이 지역의 주요 종족 종교 집단으로서 말레이족의 민족 기원을 낳았다. 문학, 건축, 요리, 의상, 공연 예술, 무술, 왕실 전통에서 말라카는 이후 말레이 술탄국들이 모방한 기준을 세웠다.[6][7]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말레이성의 요소는 말레이 군주, 말레이어와 문화, 이슬람교이며, 브루나이말레이시아에 제도화되어 있다.[8][9][10][11] 브루나이는 말레이 이슬람 군주제를 국가 철학으로 선포했다.[12] 말레이시아에서는 개별 말레이 술탄국의 주권과 이슬람교의 지위가 보존되어 있으며, 말레이 정체성은 말레이시아 헌법 제160조에 정의되어 있다.

2. 1. 말레이시아 헌법상 정의

말레이시아 헌법 제160조는 말레이인을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습관적으로 말레이어를 사용하며, 말레이 관습을 따르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또는 브루나이에 거주하는 말레이시아 시민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일부 학자들에게 "말레이시아 무슬림"으로 정의될 수 있는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할 정도로 느슨하다고 여겨지며, 따라서 민족 말레이족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인류학적 이해와는 다르다.[13] 그러나 말레이시아에는 헌법상 말레이족으로 분류될 수 없는 독특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무슬림 공동체가 존재하는데, 여기에는 말레이화를 완전히 수용하지 않은 타밀 무슬림과 중국계 무슬림과 같은 무슬림 공동체가 포함된다.

이 헌법적 정의는 말레이시아 법률 시스템에서 역사적인 말레이 종족 종교 정체성을 확고히 확립했으며,[13] 리나 조이 사건의 말레이시아 연방 법원 판결에서 알 수 있듯이 말레이인이 이슬람교에서 개종할 수 없다고 제안되었다.[14] 2023년 현재 말레이인은 말레이시아 인구의 57.9%를 차지했다(말레이시아 출생 또는 말레이 혈통의 외국 출생자 포함).

2. 2. 역사적, 인류학적 관점

말레이인과 이슬람교의 동일시는 15세기 말라카 술탄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말레이 정체성의 강력한 기풍이 발전하고 전파되었다. 말레이성의 일반적인 정의적 표지는 이 시대에 공포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지역의 주요 종족 종교 집단으로서 말레이족의 민족 기원을 낳았다. 문학, 건축, 요리 전통, 전통 의상, 공연 예술, 무술, 왕실 전통에서 말라카는 이후 말레이 술탄국들이 모방한 기준을 세웠다.[6][7]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말레이성의 요소 – 말레이 군주, 말레이어와 문화, 그리고 이슬람교 –는 말레이족이 다수인 국가인 브루나이말레이시아 모두에 제도화되어 있다.[8][9][10][11] 여전히 완전하게 기능하는 말레이 술탄국인 브루나이는 말레이 이슬람 군주제를 국가 철학으로 선포했다.[12] 말레이시아에서는 개별 말레이 술탄국의 주권과 이슬람교의 지위가 보존되어 있으며, 말레이 정체성은 말레이시아 헌법 제160조에 정의되어 있다.

제160조는 말레이인을 말레이시아 시민의 자녀로 태어나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습관적으로 말레이어를 사용하며, 말레이 관습을 따르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또는 브루나이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일부 작가들에게 "말레이시아 무슬림"으로 정의될 수 있는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할 정도로 느슨하다고 인식되며, 따라서 민족 말레이족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인류학적 이해와는 다르다.[13] 그러나 말레이시아에는 헌법상 말레이족으로 분류될 수 없는 독특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무슬림 공동체가 존재한다. 여기에는 말레이화를 완전히 수용하지 않은 타밀 무슬림과 중국계 무슬림과 같은 무슬림 공동체가 포함된다.

이 헌법적 정의는 말레이시아 법률 시스템에서 역사적인 말레이 종족 종교 정체성을 확고히 확립했으며,[13] 리나 조이 사건의 말레이시아 연방 법원 판결에서 알 수 있듯이 말레이인이 이슬람교에서 개종할 수 없다고 제안되었다.[14] 2023년 현재 말레이인은 말레이시아 인구의 57.9%를 차지했다(말레이시아 출생 또는 말레이 혈통의 외국 출생자 포함).

3. 역사

말레이시아 말레이인의 역사는 고대 말레이 왕국 시대, 이슬람교 전래와 말라카 술탄국 시대, 식민지 시대, 말레이 민족주의 대두와 독립 시대로 구분된다.

3. 1. 고대 말레이 왕국

말레이 세계는 마지막 빙하기(대략 기원전 15,000–10,000년) 이후 다양한 말레이어족 오스트로네시아인 부족의 고향으로, 흥미로운 민족적, 언어적,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준다.[15] 불교/힌두교 도래 이전에 고대 말레이 부족들은 모든 자연물에 ''스마갓''(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토착 애니미즘 신앙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16] 머복 강 어귀 깊숙한 곳에는 태양과 산을 숭배하는 여러 의식 및 종교 건축물을 보여주는 풍부한 역사적 유물이 있다.[17][18][19]

부장 계곡의 고대 민간 사찰 유적.


절정기에 이 거대한 정착지는 폭이 1000km가 넘을 정도로 뻗어 나가 말레이 반도 북부 평원을 지배했다.[17][18] 현대 기록에서 이 지역은 수아이 바투의 잃어버린 도시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535년에 건립된 이 도시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증거이며 케다 투아 왕국의 잠재적인 조상이다. 수아이 바투 외에도 말레이 반도의 해안 지역은 세계적인 농업 사회, 번성하는 숙련된 장인 정신, 다국적 상인 및 외국인 거주자에 의해 추진된 다른 고대 도시 정착지와 지역 정치체의 발전을 보여주었다. 중국 기록에는 아콜라, 판 판, 툰-선, 지에차, 치투, 포황, 랑야슈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서기 5세기 경, 이 정착지들은 주권 도시 국가로 변모하여 국제 무역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중국과 인도에서 외교 공관을 유치했다.[17][18] 7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이 작고 번창한 반도 해상 무역 국가 중 많은 곳이 스리위자야의 만다라의 일부가 되었다.[20]

3. 2. 이슬람교의 전래와 말라카 술탄국

12세기경부터 이슬람교가 말레이 반도 해안에 도달했다.[21] 이슬람교의 초기 고고학적 증거는 14세기의 테렝가누 비석이다.[22] 15세기에 말라카 술탄국은 서부 말레이 군도 대부분을 지배하며 동부 지역 이슬람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슬람화는 '말라유'라는 용어가 말라카인과 동일시되면서, 특히 외국인과 구별되는 말라카인의 문화적 선호를 나타내는 민족 종교 정체성을 발전시켰다.[6] 말레이화는 15세기 중반 술탄국의 영토 및 상업적 확장에 따라 말라카 해협 지역에서 심화된 것으로 여겨진다.[23] 1511년, 말라카의 수도는 포르투갈 정복자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술탄국은 제도적 원형으로 남아 조호르 술탄국, 페락, 파항 술탄국 등 후계 국가들의 통치술과 문화적 참조점이 되었다.[24]

3. 3. 식민지 시대

12세기경 말레이 반도 해안에 이슬람교가 도달했다.[21] 이슬람교의 초기 고고학적 증거는 14세기의 테렝가누 비석이다.[22] 15세기 말라카 술탄국은 서부 말레이 군도 대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며 동부 이슬람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슬람화는 '말라유'라는 용어가 말라카인과 상호 교환 가능해지면서, 특히 외국인과 대조되는 말라카인의 문화적 선호를 묘사하며 말라카에서 민족 종교 정체성을 발전시켰다.[6]

1540년 말레이인에 대한 포르투갈 삽화.


일반적으로 말레이화는 15세기 중반 술탄국의 영토 및 상업적 확장에 따라 말라카 해협 지역에서 심화되었다.[23] 1511년, 포르투갈 정복자들이 말라카 수도를 함락했다. 그러나 술탄국은 제도적 원형으로 남아, 조호르, 페락, 파항과 같은 계승 국가의 통치술 패러다임이자 문화적 참조점이 되었다.[24] 같은 시대에 케다, 켈란탄, 파타니 술탄국은 말레이 반도 북부를 지배했다. 남중국해 건너 브루나이 제국은 보르네오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체였으며, 16세기 중반 황금기에는 현재 사라왁의 쿠칭에서 북쪽으로 필리핀 제도까지 영토를 통제했다.[25] 18세기 미낭카바우족과 부기스족 정착민들은 각각 느그리슴빌란 족장국과 셀랑고르 술탄국을 세웠다.



역사적으로 반도의 말레이 주는 샴인과 적대적 관계였다. 말라카 술탄국은 샴인과 두 번의 전쟁을 치렀고, 북부 말레이 주는 수세기 동안 샴인의 지배를 간헐적으로 받았다. 1771년부터 샴 왕국은 차크리 왕조 아래 파타니와 케다를 병합했다. 1808년과 1813년 사이에 샴인은 파타니를 더 작은 국가로 분할했고, 1839년에는 케다에서 세툴, 랑구, 쿠방 파수, 유리를 분할했다.[28][29] 1786년, 페낭 섬은 샴인에 대한 군사 지원 대가로 케다가 동인도 회사에 임대했다. 1819년, 회사는 조호르 제국에서 싱가포르를, 1824년에는 네덜란드인에게서 네덜란드령 말라카를, 1874년까지 페락에서 딘딩스를 인수했다. 1826년 공식적으로 해협 식민지로 알려진 이 모든 무역 기지는 1867년 영국 제국의 왕령 식민지가 되었다.

말레이 주의 문제에 대한 영국의 개입은 1895년 파항, 셀랑고르, 페락, 느그리슴빌란의 말레이 통치자들이 영국 거주자를 받아들여 연합 말레이 주를 형성하면서 공식화되었다. 1909년, 케다, 켈란탄, 트렝가누, 유리는 샴인이 영국에 양도했다. 이 주들은 조호르와 함께 나중에 비연합 말레이 주로 알려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령 말라야로 집합적으로 알려진 이 모든 영국 소유와 보호령은 일본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3. 4. 말레이 민족주의의 대두와 독립



1900년대 초, 말레이 민족주의는 정치적 성격보다는 문화적 성격을 띠며 발전했다. '말레이 민족'에 대한 논의는 정치보다는 관습, 종교, 언어 측면에서 정체성과 차이에 초점을 맞추었다. 누가 진정한 말레이인으로 불릴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말레이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다양한 분파를 만들었다.[30]

케사투안 말라유 무다 좌익은 범말레이 정체성을 위한 대 인도네시아 공화국 이상을 가진 초기 세력 중 하나였다.[31] 이들이 제시한 말레이 정체성은 종교적 경계를 초월하고 군주의 역할이 없는 오리엔탈리즘말레이 인종 개념을 크게 따랐다.[32] AMCJA라는 좌익 정당 연합은 독립 말라야의 데모님 또는 시민권으로 '말라유'라는 용어를 제안하며 말레이 정체성을 재정의하려 했다. 말라야 공산당이 일으킨 무장 반란 이후, 대부분의 좌익 단체 활동은 1948년 말라야 비상 사태 선포와 함께 중단되었고, 영국 식민 정부의 대규모 숙청이 이어졌다.[31] 이러한 상황은 온건파와 전통주의파에게 말라야 독립 투쟁의 기반을 다질 기회를 제공했다.[33]

말레이 국민 통일 기구가 이끄는 보수 세력은 말레이어, 이슬람교, 말레이 군주제를 말레이성의 핵심 요소로 강력히 내세웠고, 일반 말레이인뿐만 아니라 통치자 회의의 통치자들로부터도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이들의 말라야 연합 단일 국가 계획에 대한 대규모 시위는 영국이 말라야 연방으로 알려진 대안적 연방주의 질서를 수용하도록 만들었다.[15] 이 연방은 1963년에 말레이시아로 재구성된다.

4. 언어

말레이시아에서 사용되는 말레이어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방언으로 나타난다. 과거에는 믈라카-조호르 방언이 표준어 역할을 했지만, 켈란탄어, 트렝가누어, 파항어, 케다어, 페락어, 느그리슴빌란어, 사라왁어, 브루나이어 등 다양한 방언이 존재한다.[40]

4. 1. 말레이어

자위 문자로 쓰인 말라야 독립 선언.


말레이어는 국어이자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이며, 말레이어 화자의 20%가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34] 연방 정부 정책에 따른 용어는 ''바하사 말레이시아''(문자 그대로 "말레이시아어")[35]이지만, 연방 헌법에서는 여전히 공용어를 ''바하사 멜라유''(문자 그대로 "말레이어")로 지칭한다.[36] 1967년 국어법은 라틴 문자(루미 스크립트)를 국어의 공식 문자로 명시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자위 문자의 사용도 허용한다.[37] 자위 문자는 주 이슬람 종교 부서 및 위원회의 공식 문서, 도로 및 건물 표지판에 사용되며 초등학교 및 종교 학교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말레이어는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동티모르뿐만 아니라 태국, 호주 코코스 제도, 크리스마스 섬에서도 사용된다. 표준 말레이어 화자의 총 수는 약 6천만 명이다.[38] 또한 말레이어의 한 형태인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약 1억 9천 8백만 명이다.[39] 표준 말레이어는 어휘, 발음 및 철자법 측면에서 인도네시아어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문법에도 덜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인도네시아어와 말레이어 화자 간의 효과적인 의사 소통에 이러한 차이점은 거의 장벽이 되지 않지만, 속어 또는 방언의 차이로 인해 때때로 오해가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차이가 있다.

말레이어는 말라카 술탄국 (1402–1511)의 공용어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말레이어는 이슬람 문학의 영향을 받아 빠르게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은 아랍어산스크리트어 어휘의 대규모 유입으로 언어의 특성을 변화시켰으며, 이를 ''고전 말레이어''라고 불렀다. 말라카 시대에 이 언어는 현대 말레이어 화자가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발전했다. 궁정이 조호르 술탄국을 건립하기 위해 이동했을 때, 고전 언어를 계속 사용했다. 이 언어는 네덜란드령 리아우와 영국령 조호르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리아우의 말레이어가 고전 언어와 가깝다고 종종 추정된다. 그러나 리아우에서 사용되는 말라카 말레이어와 리아우 방언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40]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어 변형은 주, 구 또는 심지어 마을에 따라 달랐다. 과거에 두드러졌던 믈라카-조호르 방언은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말레이인들 사이에서 표준적인 언어가 되었다. 또한 말레이어군에는 켈란탄어, 트렝가누어, 파항어, 케다어 (펄리스어 및 페낭어 포함), 페락어, 느그리슴빌란어, 사라왁어, 브루나이어 (브루나이 기반 피진 사바 말레이어 포함)를 포함하여 표준 말레이어 화자가 대부분 이해할 수 없는 잘 알려진 변형도 있다.

4. 2. 방언

말레이시아에서 말레이어는 주, 구, 심지어 마을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난다. 과거 믈라카-조호르 방언이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말레이인들 사이에서 표준적인 언어로 두드러졌다. 또한 말레이어군에는 켈란탄어, 트렝가누어, 파항어, 케다어 (펄리스어 및 페낭어 포함), 페락어, 느그리슴빌란어, 사라왁어, 브루나이어 (브루나이 기반 피진 사바 말레이어 포함) 등 표준 말레이어 화자가 대부분 이해할 수 없는 여러 변형도 존재한다.[40]

5. 문화

말레이 문화는 주로 다양한 말레이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로네시아인과 다양한 오스트로아시아어 부족으로 구성된 초기 정착민에서 유래되었다.[47] 서기 연초에 다르마교가 이 지역에 소개되어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해안 지역에 많은 고대 해양 무역 국가가 설립되면서 번성했다.[48][49] 이러한 고대 국가에서 유래된 문화적 정체성의 상당 부분은 동부 해안 주민(클란탄인, 트렝가누인, 파항인), 북부인(케다인 및 페라킨) 및 보르네오인(브루나이인 및 사라왁인) 사이에서 살아남았다.[2]

말레이인의 일반적인 결정적 표지 - 이슬람교, 말레이어 및 말레이 관습 - 는 말라카 술탄국 지역에서 널리 퍼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은 또한 17세기의 대규모 이주로 인해 말레이 군도의 다른 지역의 영향을 보여준다. 가장 초기의 그룹 중에는 미낭카바우인이 있으며, 이들은 느그리슴빌란에 자리를 잡았고, 부기스인은 슬랑고르 술탄국을 형성하여 조호르에 대규모로 거주했다.

이 지역에 많은 말레이 무슬림이 지배하는 중심지가 개발되면서 다야크인, 오랑 아슬리오랑 라우트와 같은 비말레이 원주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말레이어를 모방하고 복장을 모방함으로써 말레이인이 되도록 했다.[50] 말레이인은 역사적으로 유동적인 문화적 특성을 가진 해안 무역 공동체로 알려져 왔다.[51][52] 그들은 다른 외국 민족 집단의 수많은 문화적 특징을 흡수하고, 공유하고, 전파했다. 현지 말레이 문화와 다른 외국 문화 간의 문화적 융합은 또한 관련 아랍 페라나칸, 바바 뇨냐, 체티 말라카, 자위 펙안, 크리스탕, 삼삼 및 펀자비 페라나칸 문화의 민족 문화적 발전을 이끌었다.[53]

오늘날, 일부 말레이인은 해양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최근 조상을 두고 있으며, 이는 '아나 다방'("상인") 또는 말레이 문화에 동화된 외국 말레이인으로 불린다. 외국 말레이인의 다른 중요한 인구는 아체인 (케다), 반자르인 및 만다일링인 (페락), 참족과 파타니 말레이인 (클란탄 및 트렝가누), 코코스 말레이인 (사바)이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사이에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상당수의 이민자들이 상인, 정착민 및 도급 노동자로 말라야로 왔다. 1911년부터 1931년까지의 영국 인구 조사는 이민자 중 많은 수가 말레이 반도의 서해안에 집중되어 있었고, 주로 자바인이 지배적임을 보여준다.[54] 이러한 민족의 적응 및 동화 과정은 나중에 오늘날까지 자바와 수마트라의 문화적 뿌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새로운 말레이 공동체를 탄생시켰다.[55]

1971년, 정부는 말레이시아 문화를 정의하는 "국가 문화 정책"을 만들었다. 국가 문화 정책의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말레이시아 문화는 이 지역의 토착 문화, 즉 말레이 문화를 기반으로 해야 하며, 둘째, 다른 문화의 적절한 요소를 통합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슬람교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56]

전통 말레이 복장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현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복장은 바주 쿠룽과 바주 케바야 (여성용) 및 바주 멜라유 (남성용)이며, 이들은 모두 말레이시아의 국복으로 인정받고 있다.[57]

1911년부터 1947년까지 말라야의 주별 평균 말레이인 인구는 다음과 같다.[41][42][43]

외국인 말레이인[44]말레이인
조호르80,132122,993
케다3,317272,677
클란탄408325,191
말라카3,60991,275
느그리슴빌란4,74183,878
파항3,772101,984
페낭3,889128,547
페락50,403221,662
퍼를리스4939,338
슬랑고르47,59673,710
트렝가누272166,864


5. 1. 종교

대부분 이슬람교다.[45][46] 말레이시아에서 각 주의 헌법은 해당 주에서 말레이 통치자를 이슬람교와 말레이 관습의 수장으로 권한을 부여했다. ''Majlis Agama Islam dan Adat Istiadat Melayu''(이슬람교 및 말레이 관습 위원회)로 알려진 주 위원회는 통치자에게 조언하고 이슬람 문제와 말레이 관습을 규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슬람 문제 및 말레이 관습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법적 절차는 Syariah 법원에서 수행된다.

5. 2. 예술

말레이시아 말레이인의 전통 문화는 다양한 외국의 영향이 혼합된 토착 말레이 문화가 지배적이다. 다른 지역의 말레이인과 달리 남부 말레이인(슬랑고르인, 느그리슴빌란인, 말라카인 및 조호르인)은 말라카 술탄국의 문화 유산을 보여준다.

말레이 문화의 많은 부분은 말레이 문화의 강한 영향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케라맛 신사 숭배의 관행이 말레이시아 화교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는 것은 말레이 문화에서 유래된 신념 체계에서 볼 수 있다. 다른 말레이 문화의 영향은 전통 복장, 요리, 문학, 음악, 예술 및 건축에서도 볼 수 있다.

마크 용, 돈당 사양, 실랏, 판툰, 송켓, 메크 물룽, 크리스, 와양 쿨릿, 바틱, 피나스 및 가믈란을 포함하여 다른 많은 말레이 문화 유산이 말레이시아 국가 유산으로 간주된다.[58] 15세기부터 번성한 고전 말레이 문학 전통과 다양한 장르의 말레이 민속 또한 현대 말레이시아 문학 및 민속의 기초를 형성한다. 말레이시아 음악 장면 또한 말레이 전통 음악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말레이 사회 춤과 아슬리, 이낭, 조겟, 자핀, 가잘, 봉가이, 디키르 바랏, 보리아, 크론총 및 로닷과 같은 혼합 음악을 결합한 말레이시아 팝 음악 유형인 ''Irama Malaysia''('말레이시아 비트')의 등장이다.[59]

5. 3. 문학

고전 말레이 문학 전통과 다양한 장르의 말레이 민속은 15세기부터 번성하였으며, 현대 말레이시아 문학 및 민속의 기초를 형성한다.[58]

6. 인구 통계

말레이시아의 주별 말레이인 인구는 2020년 및 2023년 인구 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60] 사바와 사라왁을 제외한 모든 주에서 말레이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특히 트렝가누는 2023년 기준 97.4%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며, 푸트라자야 (96.0%), 클란탄 (95.5%) 등이 그 뒤를 잇는다. 반면 사바 (12.0%)와 사라왁 (25.2%)은 상대적으로 낮은 비율을 보인다.

말레이시아 외 지역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크리스마스섬에 말레이시아 말레이인 공동체가 있으며, 섬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한다.[61]

6. 1. 말레이시아

말레이인은 말레이시아의 주요 민족이다. 사바와 사라왁을 제외한 모든 주에서 말레이인의 인구는 40%에서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두 주는 말레이인의 비율이 30% 미만인 유일한 주이다.[60] 2023년 및 2020년 인구 조사 자료는 다음과 같다.[60] 인구 수치는 비시민권을 포함한 전체 주 인구의 백분율로도 제공된다.

2023년[60]2020년[60]
인구비율(%)인구비율(%)
조호르2,232,58659.32,158,94358.5
케다1,680,75980.51,624,36679.7
클란탄1,735,52195.51,671,09795.1
쿠알라룸푸르846,56447.4824,77046.5
라부안35,30240.323,60428.0
말라카676,65771.4653,81770.5
느그리슴빌란719,96562.2692,90661.2
파항1,174,14375.61,134,90075.0
페락1,408,98258.71,359,76057.7
페낭727,73345.1707,15544.2
프를리스250,82688.6245,35888.1
푸트라자야110,40096.0101,82495.7
사바320,76012.0237,3559.1
사라왁597,74425.2575,11424.7
슬랑고르3,955,60160.13,806,79659.2
트렝가누1,144,45097.41,090,43397.1
말레이시아 총계17,610,45857.916,901,57856.8


6. 2. 해외 거주 말레이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외부 영토인 크리스마스섬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말레이시아 말레이인 공동체가 있다.[61]

7. 하위 집단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인은 크게 아낙 자티(Anak Jati)아낙 다강(Anak Dagang) 두 가지 하위 집단으로 나뉜다.

아낙 자티는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섬 해안 지역에 원래부터 거주하던 말레이 소수 민족들을 가리킨다. 아낙 다강은 '상인' 또는 '외국 말레이인'을 의미하며, 아체족, 반자르족, 부기스족 등 해양 동남아시아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후손을 말한다. 이들은 대부분 말레이화되어 현지 말레이 문화에 동화되었다.[62]

17세기부터 부기스족 용병과 상인들이 말레이 술탄국에서 활동하며 클랑강과 셀랑고르강 하구에 정착했다. 미낭카바우족은 느게리슴빌란으로 이주하여 원주민과 혼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원주민 관습법과 전통 정치 조직을 채택했다. 19세기에는 영국령 말라야의 경제 성장과 함께 인도네시아인의 유입이 증가했다. 템궁 다엥 이브라힘과 아부 바카르 오브 조호르 통치 시기 조호르 주는 농업 노동력 확보를 위해 자바인 이주를 장려했다.[62]

1911년에서 1957년 사이, 말라야의 인도네시아계 인구는 전체 말레이인의 8.6%에서 14.5%를 차지했다. 1931년 조호르에서는 인도네시아계 인구가 전체 말레이인의 50%를 넘기도 했다. 1957년 이후 인도네시아인의 이주가 제한되면서, 이들은 대부분 말레이 정체성에 동화되었다.[62]

최근에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참족 난민들이 말레이시아로 이주하여 말레이 문화에 동화되기도 했다.[62]

말라야: 전체 말레이 인구에서 인도네시아인의 비율[62]
19111921193119471957
싱가포르42.439.942.138.231.7
페낭4.53.12.42.21.7
말라카4.03.23.34.53.6
페락16.618.821.417.110.5
셀랑고르27.328.445.643.932.3
느게리슴빌란4.53.96.55.94.7
파항1.24.25.83.02.6
조호르34.242.551.531.525.6
케다1.01.21.61.01.1
클란탄0.010.30.10.10.1
트렝가누0.020.10.30.20.2
페를리스0.10.10.20.10.2
말라야8.6%10.8%14.5%12.3%8.7%


7. 1. 아낙 자티 (Anak Jati)

'''아낙 자티'''(Anak Jati) 그룹은 말레이 반도와 사바, 사라왁의 해안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말레이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다. 다음은 주요 하위 그룹의 일부이다.

민족 집단언어원주민 지역지역
브루나이 말레이족브루나이 말레이어사라왁(미리, 라와스 및 림방), 사바(시피탕, 보퍼트, 쿠알라 페뉴, 파파르, 코타 키나발루), 라부안보르네오 해안
조호르 말레이족[1]조호르 말레이어조호르, 남부 파항(롬핀), 남부 말라카(자신), 남부 느게리슴빌란(탐핀)말레이 반도 남부
케다 말레이족케다 말레이어케다,




7. 2. 아낙 다강 (Anak Dagang)

인도네시아계 말레이시아인 참고

원주민 말레이인인 ''Anak Jati'' 외에도, 말레이시아에는 해양 동남아시아의 다른 민족 혈통을 전부 또는 일부 가진 말레이 공동체가 있다. 이 공동체는 통칭하여 상인 또는 외국 말레이인을 의미하는 ''Anak Dagang''이라고 불리며, 아체족, 반자르족, 바웨안족, 부기스족, 참족, 자바족, 미낭카바우족, 타우수그족 등 다양한 민족 이민자들의 후손으로, 효과적으로 말레이화되어 현지 말레이 문화에 동화되었다.[62]

17세기부터 부기스 용병과 상인들은 말레이 술탄국에서 상업적, 정치적 사업에 참여하여, 나중에 클랑과 셀랑고르 하구에 주요 정착지를 건설했다. 또 다른 이주 사례는 미낭카바우족의 느게리슴빌란으로의 이주였다. 그 결과 미낭카바우 이민자와 원주민인 프로토말레이 투먼족 사이의 혼인으로 느게리슴빌란에 말레이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원주민 관습법(''Adat Benar'')과 전통적인 정치 조직을 광범위하게 채택했다. 말레이 반도를 포함하는 이전의 민족 이동은 본질적으로 양자적이라고 묘사되는 것 외에도, 인구 통계학적 변화를 야기한 대규모 이주에 대한 다른 증거 없이, 그 범위가 작다고 묘사할 수 있다.[62]

19세기에 인도네시아인의 유입 증가는 말라야에서 영국 영향력의 강화와 일치했다. 이는 해협 식민지와 말라야 중부 및 남부의 인접한 서해안 주에 있는 경제 중심지가 이민자들의 주요 목적지가 된 광범위한 경제 성장의 시기였다. 1824년에 인도네시아 이민 인구는 해협 식민지의 영국 행정부에 의해 처음으로 집계되기 시작했다. 1871년까지 해협 식민지의 인도네시아 인구는 12,143명으로 기록되었으며, 대부분은 싱가포르에서 발견되었으며, 자바인이 가장 많은 민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인구는 상당히 적었고, 그들의 성장은 중국인에 비해 느렸다. 1891년에는 인구 조사가 말레이 연방 주로 확대되어 총 20,307명의 인도네시아인이 기록되었다. 동시에, 템궁 다엥 이브라힘(1841–1855) 통치 하의 조호르 주는 주 농업 부문에서 일할 자바에서 온 농장 노동자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그러한 정책은 그의 아들인 아부 바카르 오브 조호르의 통치 하에서도 계속되었다. 그 결과, 1911년 말라야 전역의 첫 번째 인구 조사에서 조호르는 말라야 전체 117,600명의 인도네시아인 중 37,000명으로 가장 많은 인도네시아 인구를 기록했다.[62]

1911년과 1957년 인구 조사 사이에서 말라야의 인도네시아 인구는 전체 말레이인의 8.6%에서 14.5% 사이였으며, 북부 및 동부 주의 원주민 말레이인보다 수적으로 열세였다. 1911-1957년 기간 동안 개별 주에서 인도네시아 인구는 1931년 조호르에서만 전체 말레이인의 50%를 초과했다. 1957년 이후 말라야로의 인도네시아인의 이동에 대한 정부의 더 엄격한 통제로 인해, 과거 말라야에서 유사한 이주 패턴을 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와 원주민 말레이인과의 가깝고 강력한 문화적, 민족적 관계 때문에, 수십 년 안에 이러한 인도네시아 이민자 대부분은 효과적으로 말레이화되어 말레이 정체성에 동화되었다.[62]

최근에는 베트남 전쟁 동안, 상당수의 참족이 말레이시아 반도로 이주했는데, 그들은 동료 무슬림에 대한 동정심으로 말레이시아 정부에 의해 피난처를 받았다. 그들 대부분은 또한 말레이 문화에 동화되었다.[62]

말라야: 전체 말레이 인구에서 인도네시아인의 비율,[62] 1911-1957
19111921193119471957
싱가포르42.439.942.138.231.7
페낭4.53.12.42.21.7
말라카4.03.23.34.53.6
페락16.618.821.417.110.5
셀랑고르27.328.445.643.932.3
느게리슴빌란4.53.96.55.94.7
파항1.24.25.83.02.6
조호르34.242.551.531.525.6
케다1.01.21.61.01.1
클란탄0.010.30.10.10.1
트렝가누0.020.10.30.20.2
페를리스0.10.10.20.10.2
말라야8.6%10.8%14.5%12.3%8.7%


8. 유전학

현대 말레이인의 유전학 연구는 복잡한 혼합의 역사를 보여준다. 말레이인은 유전적으로 다양하며, 서로 다른 말레이인 집단 간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발생한 지리적 고립과 독립적인 혼합에서 기인했을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단일 대표 유전자 구성 요소는 없으며, 말레이인은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 프로토 말레이, 동아시아, 남아시아의 네 가지 주요 조상 구성 요소를 가진다. 이 중 오스트로네시아 및 프로토 말레이 구성 요소가 게놈의 60–70%를 차지한다.[65] 오스트로네시아 구성 요소는 대만 아미족 및 아타얄족과 관련이 있으며, 동남아시아의 오스트로네시아 구성 요소에 대한 유전적 분석은 "대만 밖으로"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지만, 일부에서는 대만에서 기여도가 적고 대부분 토착적이라고 주장한다.[63][64] 템안족과 같은 프로토 말레이는 약 4,000–6,000년 전에 중국 윈난성에서 이동했다는 유전적 증거를 보여준다.[67] 남아시아인(인도인)과의 혼합은 오래전(일부 인도네시아 말레이인에서 최대 2,250년 전으로 추정)일 수 있으며, 동아시아인(중국인)과의 혼합은 더 최근(100–200년 전)[65]일 수 있지만, 일부는 자바에서 15세기 이전에 발생했을 수 있다.[67] 또한 네그리토스(말레이 반도의 초기 거주자), 중앙아시아인 및 유럽인과 같은 다른 집단에 의해 기여된 소규모 구성 요소도 있다. 대부분의 혼합 사건은 175~1,500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65]

말레이 반도 내에서 말레이인은 말레이 반도 북부와 남부 사이에 유전적으로 뚜렷한 클러스터로 구분된다.[66] 다섯 개의 하위 민족 집단에 대한 SNP 분석 결과, 멜라유 켈란탄과 멜라유 케다 (모두 말레이 반도 북부에 위치)는 서로뿐만 아니라 멜라유 파타니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멜라유 미낭(서부), 멜라유 자와 및 멜라유 부기스(모두 남부)와는 구별된다.[68] 멜라유 미낭, 멜라유 자와 및 멜라유 부기스족은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들과 공유하는 공통 조상의 증거를 보여준다.[67] 그러나 멜라유 미낭은 멜라유 자와보다 멜라유 켈란탄과 멜라유 케다에 유전적으로 더 가깝다. 멜라유 켈란탄 및 멜라유 케다 집단 사이에는 특히 텔루구족과 마라티족에서 상당한 인도 구성 요소가 있다. 멜라유 케다와 멜라유 켈란탄은 다른 말레이 집단보다 오랑 아슬리 세망의 두 하위 그룹인 자하이와 켄시우와도 더 밀접한 유전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연구에서 말레이 하위 민족 집단 중 4개(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사람들과 관련된 멜라유 부기스 제외)는 프로토 말레이 템안족과 유전적 유사성을 보여주며 자와 집단 및 중국 윈난성와족과의 혼합 가능성이 있다.[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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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웹사이트 2023 Population and Housing Census of Malaysia https://www.dosm.g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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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논문 Dissecting the genetic structure and admixture of four geographical Malay populations 2015-09-03
[66] 논문 Fine-scale population structure of Malays in Peninsular Malaysia and Singapore and implications for association studies 2015-07-22
[67] 논문 Population Genetic Structure of Peninsular Malaysia Malay Sub-Ethnic Groups 201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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